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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맛과 멋] 너무 움직이지 마라

지병 때문에 일 년에 서너번씩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 아닌 시술을 하는 나는 할 때마다 체력이 떨어진다. 워낙 오래 투병생활을 하는지라 시술받고 나서도 혼자 해 먹는 게 귀찮을 뿐만 아니라 첫째는 힘에 부쳐서 대충 때우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연초에 막상 한번 또 죽음의 문턱에 다녀오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세상에 좋은 게 너무 많은데, 죽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억울하다. 그래서 좀 더 살기로 작정하고 식생활 개선부터 시작했다. 아침 공복에 레몬과 올리브 오일 한 스푼씩 마시는 이탈리안 보톡스가 건강에 좋다는 얘기를 듣고 그것을 실천한다.     아침 식사는 요거트다. 혈압과 콜레스테롤에 좋다는 청국장 가루를 크게 두 스푼 넣고, 잣과 호두, 아몬드, 해아라기 씨, 바나나와 사과 반 개씩, 키위 하나, 블루베리 한 스푼을 넣으면 한 사발 가득하다. 그 거대한 요거트 볼을 조금씩 먹으면서 커피를 마신다. 요거트가 맛이 없어 커피를 많이 마시게 된다. 비록 냄새는 없다지만, 청국장으로 도배한 요거트가 맛이 있으면 이상한 거지. 그래도 상큼한 사과가 씹히는 맛에 커피를 반주 삼아 의무로 먹는다. 그렇게 먹어서인지 평생 동반자였던 만성피로와 변비가 사라졌다. 일반적으로 몸의 컨디션이 많이 정상적으로 환원되고 있다는 말이 더 올바른 표현일 것 같다.   문제는 기력 쇠퇴. 기력이 없다는 게 부엌에서 음식 한 가지만 만들어도 허리가 아프고 주저앉고 싶다. 김치만 담가도, 나물 하나 볶아도, 된장국 하나 끓여도 몇 번씩 부엌과 침대를 오락가락해야 한다. 외출은 더더욱 문제다. 하루에 한 가지만 해야지 두 가지만 해도 다음 날 일어나지 못한다. 마음은 아직도 창공을 훨훨 나르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고역이 이만저만 아니다.     얼마 전, 친구가 ‘너무 움직이지 마라’라는 책이 작년에 자기가 읽은 책 중에 최고라며 그 책 얘기를 해줬다. 이 책은 일본의 젊은 철학자 지바 마사야가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의 철학을 자기 식대로 재해석한 책이라고 한다. 나는 너무 움직이지 말라는 제목이 맘에 들어 친구의 얘기를 흥미있게  들었다.     사실 우리는 ‘더 성공하기 위해 트렌디한 자기계발서를 읽고, 더 ‘건강히’ 잘 살기 위해 요가와 명상과 운동을 하고, 더 좋은 인맥, 더 좋은 모임, 더 좋은 맛, 더 좋은 곳, 더 좋은 정보, 더 좋은 변화, 더 좋은 그 무엇을 탐하는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 살고 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나만 ‘뒤처지는 삶’인가 싶어 불안해진다. 이것은 ‘근면한 일벌레가 언제나 옳다’는 그릇된 기독교의 근면 주의에 깔려 짓눌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강요에 갇혀 있지 말고 ‘쓸모없어 보이면서도, 무용한 유희, 무용한 산책, 무용한 대화, 무용한 놀이, 무용한 유유자적이 우리 삶에 왜 존재해야 하는가’하는 존재 이유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물론 친구는 굉장히 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많은 얘기를 했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들으면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쉽게 말하면 성공하기 위해 너무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때로는 너무 움직이지 말고 관조하는 시간을 가지면 어떻겠냐는 얘기를, 학자들은 쉬운 말도 어렵게 한다.     처음에 병 자랑을 하면서 내가 얼마나 힘든지 장황하게 얘기했는데, 친구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 내가 사는 모습이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나를 그 책에 이입해서 마치 내가 그렇게 너무 움직이지 않고 살고 있음에 슬그머니 어깨가 올라갔다면 망상일까, 착각일까. 이영주 / 수필가뉴욕의 맛과 멋 천일 철학자 지바 천일 동안 청국장 가루

2022-05-20

[뉴욕의 맛과 멋] 태양의 정기(精氣)를 보내주는 여자

지난 월요일, 1박 2일로 아미시(Amish) 마을 랑카스터를 다녀왔다. 오랜 지기 마리아씨의 선물이다. 나는 아미시가 기계문명을 거부하고 옛 농사 방식으로 자급자족하며 사는 집단이라고만 생각했지 그들이 재세례파 계통의 개신교 종파라는 건 이번에 알았다. 창시자는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야곱 아망으로, 17세기 이후 탄압을 피해 유럽에서 이주한 스위스-독일계 이민자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우리가 간 펜실베이니아주 아미시 카운티의 랑카스터는 아미시들의 중심지로, 인구 6만여 명의 펜주에서 8번째로 큰 도시이다. 한때 주 수도였던 타운답게 다운타운은 펜광장(Penn Squ-are)를 중심으로 아미시 상품 판매소인 센트럴 마켓(Central Market)을 비롯해 메리어트 호텔, 음식점, 상가들이 포진해 있고, 음악학교도 눈에 들어온다. 대중적인 메리어트 호텔이 이렇게 클래식하고 육중한 건물인 것은 처음이다. 그 외에도 고색창연한 묵직한 빌딩들이 적지 않고, 상점들도 단정하다. 특이한 점은 대개의 상점이 큰 도자기 항아리에 색색의 꽃을 장식해 놓았다. 보는 사람의 눈과 마음이 저절로 즐거워진다.     낯선 도시들을 가보면 생동감이 넘치는 곳이 있는가 하면 고스트 타운처럼 죽어가는 도시도 있고, 프라하처럼 클래식하고 파스텔 톤의 색조가 멋스럽던 도시가 마치 미국의 어느 소도시에 온 것처럼 온갖 명품 대형가게들로 탈바꿈해 낯설어지기도 한다. 랑카스터는 청결함과 관리 잘 된 도시의 모습이 참으로 상큼한 인상을 주었다. 다운타운뿐만 아니라 타운 곳곳을 다녀도 모든 빌딩과 가옥들이 매우 정돈되고 청결했으며, 잘 가꾸어져 있다.     마리아씨가 랑카스터 인근을 이 골목 저 골목 헤집고 다닌 덕분에 목축업이 주요 생업인 아미시들의 생활을 그나마 살펴볼 수 있었다. 소 목장도 있지만 말 목장이 많은 건 의외였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 소똥, 말똥 냄새가 풍기는 게 마치 한국 우리네 시골을 지날 때마다 나던 거름 냄새와 흡사해 익숙했다. 정원의 화초에도 거름을 주어 냄새가 진동하는 아미시 집에는 높은 빨랫줄이 있고, 거기에 어두운색의 옷들이 집게에 집혀 널려 있었다. 아직도 거리엔 마차가 다니고 마차 판매점도 있지만, 대부분의 집에 자동차가 있는 걸 보면, 그네들에게도 21세기 폭탄적인 물질문명과 기계문명은 더는 거부만 할 수 없었나 보다.     모처럼의 봄맞이 외출로 내가 몰랐던 아미시들의 절제와 근면의 삶을 엿볼 수 있었던 일은 좋은 학습이었다. 그들의 레트로 적 삶을 보면서 지구의 환경 문제를 떠올린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첨단기술이나 기계 사용을 줄이고, 이들처럼 자연 비료로 농작물을 재배한다면 지구가 훨씬 건강해지지 않을까? 지구만 건강해질 수 있다면 까짓 거름 냄새쯤도 얼마든 견딜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 동안 함께 하면서 마리아씨를 더 많이 알게 된 일도 기쁘다. 바닷가에 사는 마리아씨는 매일 새벽 해가 뜨기만 하면 즉시, 시간에 구애하지 않고 그 광경을 찍어 카톡을 보낸다. 왜 그렇게 보내느냐고 물었더니 떠오르는 태양의 정기를 보내주고 싶어서란다. 반론의 여지가 없다. 뉴욕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가정’이라 우러르는 모범적 가정을 이룬 어머니이나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험을 즐기는 이 시대 여인이기도 하다. 내가 딸들에게 늘 하는 말도 인생은 도전이고 모험이라는 것이다. 나는 도전하는 삶, 정지하지 않고 매일 진화해가는 삶을 지향한다. 그렇게 사는 벗이 주변에 있다는 건 특별한 축복이라 여겨진다.   여정이 내겐 좀 힘들었지만, 그래도 마리아씨든, 그 누구든, 나를 부르면 나는 곧 떠날 준비가 늘 되어 있다. 왜? 살아있는 동안 이 세상을 마음껏 누려야 하니까. 이영주 / 수필가뉴욕의 맛과 멋 정기 태양 거름 냄새쯤 메리어트 호텔 고스트 타운

2022-05-06

[뉴욕의 맛과 멋] 사순절의 선물, 후배들의 치사랑

대학 후배들과 저녁을 먹었다. 권오문이 오랫동안 진행하던 치아 임플란트 공사가 끝나 외식을 할 수 있다며 서둘러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김진은 붉은 장미 12송이의 화려한 꽃다발을 내 가슴에 안기면서 초장부터 나를 들뜨게 했다. 속사정이야 어떻든 내 나이에 연하남(?)에게 꽃다발을 받는 건 근사한 팩트다. 진짜 감동은 권오문이 아내가 챙겨준 밑반찬들을 한 가방 가득, 내가 들 수 없을 정도로 그득 챙겨온 일이다. 돼지감자, 깻잎 장아찌는 직접 마당에서 재배한 것이고, 마늘장아찌와 고추장, 참기름, 들기름, 볶은 참깨, 고춧가루는 서울서 공수해온 것, 거기다 직접 담은 매실청과 우엉차까지 얌전하게 포장해서 보낸 아내가 “모두 건강식이니 이것들 드시고 선배님 건강해지시라”고 했다며 덕담까지 얹어 신나게 전한다. 권오문은 코로나로 몬태나 있을 때도 콩나물 콩과 함께 이런 밑반찬들을 잔뜩 보내줘서 얼마나 요긴하게 먹고,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는지 모른다. 이날 끝까지 맘껏 먹을 수 있던 비싼 갈비는 이종률이 샀다. 이종률은 “선배님, 말씀만 하세요, 언제든 모시겠습니다”는 후배, 내 안부를 물어오는 (권오문 빼고) 유일한 후배다.     이들은 맥주와 소주를 마시면서도 화제가 모두 대학 얘기뿐이었다. 한국서 하는 대학 평가에서 우리 대학이 4위라든가 지난달에는 2위였다든가 하면서, 대학교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여간 뜨거운 게 아니다. 대학 동문이 지금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잘 나가고 있는지 잘 나가는 동문 선후배들의 얘기도 끝이 없다. 하긴 이들은 우리 대학 뉴욕동문회의 기둥들이다. 두 사람 모두 회장을 역임했고, 권오문은 영원한 이사장으로 동문회를 위한 봉사가 현재 진행 중이다.     사순절을 보내며 유난히 후배들과 친구들과 가족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을 기회가 적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순절은 절제와 극기를 실천하며 조용히 묵상하면서 자신을 뒤돌아보는 시기로 삼아왔다. 겨울의 추위와 눈보라로 무력해지거나 가라앉으려던 자아를 움트는 새순들처럼 봄의 입김에 청정한 기압으로 쏘아 올려 자신도 새로 거듭나는 시간인 까닭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보니 모든 유형무형의 제약들로부터도 자유로워짐을 느낀다. 무겁고 진중하기만 했던 사순절을, 예수님의 고통을 나눠 받으려고 의식적으로 엄숙해지려고만 했던 사순절을, 나도 모르게 예수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기쁨의 기간으로 맞고 있다. 신앙적으로 그게 맞고 틀리고는 모르겠고, 이젠 고통이라는 게 축복이라는 걸 너무 잘 이해하니까 고통마저도 감사하게 받게 되었다면 설명이 될까.     혹자는 할 일 없이 살 때, 해야 할 모든 것을 하게 되고, 바라는 것을 버리면 바라는 것이 우리를 찾아오며 그것이 바로 삶의 신비로운 비밀, 엄청난 공덕이라고 한다. 이런 글들을 읽으면 그냥 그 느낌이 내 안으로 스며든다. 대학 동문회를 위해서 별 공로도 없는 선배임에도 따뜻하게 대해주는 후배들의 정도 그래서 더 진하게 체감된다. 이것은 한국인의 정, 그 무한한 정일 터. 아직도 대학 시절의 치기를 즐기는 후배들의 치사랑이 정답기만 하다. 이영주 / 수필가뉴욕의 맛과 멋 사순절 선물 대학 동문회 대학 후배들 선물 후배들

2022-04-22

[뉴욕의 맛과 멋] 숨어있던 보물 ‘매실’

내 김치냉장고 한쪽은 한국의 된장, 고추장 등 장류 저장고이다. 어제 배추 된장국 끓이려고 된장과 고추장을 꺼내는데 고추장이 든 작은 용기가 서너개가 되었다. 한국서 올 때 친구들 혹은 지인들이 준 것을 먹다 보면 그렇게 된다. 보통 때도 늘 보던 장면이지만, 왠지 눈에 거슬려서 “이걸 한데 모아야지” 싶었다. 꺼내다 보니 오른쪽 구석에 밑에 매실 병이 있다. 매실청 건더기인데, 뚜껑에 2017년 5월 14일이라는 명찰이 붙어 있다.     요즘은 셰프들도 요리할 때 보면 매실청이 빠지는 적이 없다. 매실이 워낙 천연소화제에 기관지와 피로해소에 좋다고 해서 매실청 담는 집이 많다. 나도 덩달아 매실 장아찌를 몇 번 담았다. 매실 씨에 독성이 있다고 해서 씨를 다 빼고 담았는데, 씨 빼는 작업이 하도 일이 많아 몇 번 만들다 포기했다. 그러다가 매실을 씨째로 담아도 일 년 동안 숙성시키면 독이 다 빠져서 아무 상관 없다는 말을 듣고 작년에 다시 매실청을 담았다. 5월에 일 년이 된다.   나는 신 것을 매우 싫어해서 매실청 따르고 나면 건더기는 그냥 버렸다. 그 신맛 나는 매실로 장아찌를 만든다든가 하는 건 엄두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워낙 매실이 비싸니까 아깝단 생각이 없진 않았나 보다. 그래서 버릴 날을 미루다가 잊어서 밑에 깔린 바람에 얘는 아직 명줄이 남았던 것이다.     첨엔 그냥 버리려고 했다. 그래도 씨를 빼고 만드느라 애썼던 내 노동에 미련이 남아 형식적으로 한쪽을 먹어 보았다. 그리고 얼떨떨해졌다. 아직도 오돌오돌한 매실은 신맛은 무늬뿐, 뭔가 입맛을 돋워주는 오묘한 매력이 있었다. 만 5년 동안 숙성되었으므로 신맛이 그동안 무뎌지고, 청은 따라낸 후이니 당도도 적당했다. 조금 꺼내어 간장에 살짝 무쳤더니 은근히 입 안을 사로잡는다. 마치 횡재한 기분이 들었다. 손댄 김에 신이 나서 내가 먹을 것은 그렇게 간장에 버무리고, 나머지는 고추장에 버무렸다. 늘 소화 문제로 골치 썩는 첫째에겐 아주 좋은 선물이 될 것 같고, 친구들에게도 나누어주면 좋을 것 같다. 매실 장아찌는 이렇게 청을 따르고 남은 건더기를 입맛에 맞게 간을 해서 장아찌로 먹으면 되는데, 진즉에 그러지 못한 일이 새삼 아깝기 짝이 없다.   시답잖게 여겼던 매실의 발견이 마치 숨은 보물찾기에서 보물 찾은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사실 우리 어릴 적엔 안방 위에 있던 ‘다락’이 보물창고였다. 다락 위엔 꿀이며 엿, 밤, 곶감 등 우리들의 간식거리가 있었지만, 아이들에겐 접근금지의 성역이었다. 그것을 몰래 훔쳐 먹을 때의 스릴과 두근두근 가슴 뜀. 들켜서 혼나도 마냥 즐거웠다. 그리고 겨울이면 뒷마당 항아리에서 짚 위에 켜켜이 쌓여 있는 홍시가 익기를 기다리던 안타까움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보니 어릴 때의 그 기다림과 설렘과 애달픔의 시간이 우리에겐 인생의 인내와 절제를 위한 숙성기였음을 새삼 깨닫는다.     사순절이다. 5년을 묵히니까 원래의 신맛이 무뎌지고 순해진 매실을 보면서 나를 돌아본다. 푹 삭은 매실처럼, 오래된 장처럼, 세월의 두께가 인성의 향기로 담금질 된 사람을 보면 아무 말 없이 옆에만 있어도 평화를 느끼고, 신뢰와 치유가 모르는 새 스며든다. 언젠가는 나도 매실처럼 깊이 숙성되어 사람들에게 그렇게 스며들 수 있겠지. 그 날을 기다리며…. 이영주 / 수필가뉴욕의 맛과 멋 보물 매실 된장 고추장 김치냉장고 한쪽 뒷마당 항아리

2022-04-08

[뉴욕의 맛과 멋] 캡틴 대한민국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써 한 달이 되었다.  어느 시대,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전쟁은 인류 최대의 난제다. 그 사이에서 무고하게 처절한 희생을 당하는 건 국민 뿐이다. 정치에 문외한인 나는 루스벨트 대통령 시대부터 시작되었다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복잡한 국제 관계는 잘 모른다. 그러나 지금 세계의 시선을 집중적으로 받는 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젤린스키를 보면서 한 국가 지도자의 의무와 책임을 생각하게 되었다.   러시아 침공 5일째인 3월 1일, 젤린스키 대통령이 유럽의회의 대면 인터뷰에서 “삶이 죽음을 이길 것이며 빛이 어둠을 이길 것”이라고 한 연설은 인상적이었다. 타임은 그런 그를 두고 찰리 채플린이 윈스턴 처칠로 변모한 것 같다고 평가했는데, 젤린스키 대통령이 유명 코미디언 출신이란 사실이 흥미로운 부분이긴 하다. 실상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대부분의 세계 여론은 하루 이틀 안에 수도 키이우가 러시아에 함락될 것이라 예상했다. 나 역시도 고래와 새우싸움이라고 보고 있었으니.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아직도 끈질기게 버티고 있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항공편 제공을 시사하며 망명을 권하자, 군복 입은 젤린스키 대통령은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도망갈 항공편이 아니라 더 많은 탄약입니다” 라면서 각료들과 함께 수도에 남아 끝까지 싸우겠다고 단호하게 대처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우크라이나 국민은 물론 전 세계 모두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13만명이 자원입대했고, 세계 곳곳에 나가 있던 우크라이나 젊은이들이 속속 귀국하고 있다고 한다. 용감한 지도자에겐 용감한 국민이 있는 것 같다.     최근 대통령을 새로 뽑은 우리나라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대선 전까지의 양상은 완전 오리무중이었다. 누가 뽑힐지 마지막 순간까지 박빙의 승부였다. 혹자는 윤석열 후보가 0.73%, 24만 표차로 승리한 사실을 두고 그 24만표를 80대가 이루어낸 기적이라고도 한다. 그 많은 여론조사에서 80대는 노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적을 이루어낸 1943~1938년생은 6·25 때 초등학생, 4·19 때 대학생들이었으며 5·16 때 군 복무를 학보로 18개월 단기복무를 했던 00 군번 들이었고, 예비군과 민방위에도 초창기에 참여한 세대. 새마을운동에도 앞장섰고, 대졸 출신들이 서독 광부로 지원했으며 중동 건설 현장에서 땀 흘리며 외화를 벌어 애국한 세대라는 것이다. 가난한 엘리트로 토요일도 일요일도 야근한그들 80대의 노고로 한국의 경제가 오늘 같은 장족의 발전 기틀을 마련했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SKY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3가지 조건인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 할아버지의 경제력의 주인공이 그들이라고 한다.   나는 다시는 우리가 사는 이 지구 어디에서도 몸서리치는 전쟁을 보고 싶지 않다. 하루빨리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고, 팬데믹으로 깊이 상처 입은 지구인들이 제발 편안해지면 좋겠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를 보면서 진실로 나라다운 나라, 지도자다운 지도자, 국민다운 국민을 볼 수 있었다는 감동은 간직할 것이다. 소셜미디어에선 이런 젤린스키 대통령에게 ‘캡틴 우크라이나’라며 칭송이 쏟아지고 있다. 그를 보면서 ‘캡틴 대한민국’의 출현을 기다리는 건 비단 나 뿐만의 기대는 아닐 것이다. 이영주 / 수필가뉴욕의 맛과 멋 대한민국 캡틴 우크라이나 대통령 우크라이나 국민 우크라이나 전쟁

2022-03-25

[뉴욕의 맛과 멋] 인생은 숨은그림찾기

오늘 14번째 수술(시술)을 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한 번의 수술과 13번의 시술이다. 기도 양쪽 폐의 입구에 있는 암을 발견한 것은 10년 전 일이다. 그때 키모와 방사선 치료를 받고 다행히 암이 사라졌다. 그러다가 6년째 되는 2018년, 처음 폐에 조그맣게 있던 점이 자라서 아직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깨끗이 잘라 버리자고 해서 폐암 수술을 받았다.  폐암 수술을 하다가 먼저 치료해서 사라졌던 암이 꽤 자라고 있음을 발견해서, 시술이 시작되었다. 위치가 기도의 폐 입구여서 수술이 불가하여 내시경으로 들여다보고 레이저를 쏘아 암을 태우는 시술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암은 희귀암이라 원인도 모르고, 원인을 모르니 치료 약도 없어 이렇게 레이저 쏘는 방법밖에 없다고 한다. 다행히 빨리 자라는 암이 아니긴 한데, 완치도 안 되는 암이라서 평생 이 암이란 녀석을 끼고 살아야 한다. 나이가 있는 데다가 시술할 때마다 전신마취를 하니 할 때마다 체력이 조금씩 떨어지는 건 피할 수 없다.     이번 14번째 시술은 지난 2월 14일 13번째 시술 후 3주 만에 하는 재수술이었다. 호흡 장애가 심해서 거의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위중해서 나도 내가 이렇게 죽는가보다!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른다. 그런 데다가 주치의가 수술 후 회복실에 와서 침통한 얼굴로 부위 전체가 너무 많이 자라서 한 번에 다 치료할 수 없어 3주 후에 재수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한 번도 회복실에 오지 않던 집도의가 회복실에 온 것도 가슴이 철렁한 데, Bad, Unhappy란 단어를 입 밖으로 내니 가슴이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력 강한 내가, 사람들이 긍정의 여왕이라고 부르는 나도 패닉 상태가 되었다.   수술실에 들어갈 때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내가 살아서 이 방을 나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번 수술실은 최고의 수술실이었다. 지난달까지의 수술실은 늘 공기가 차고, 수술대 위에 누우면 여간 추운 게 아니다. 그래서 “이 방은 너무 추워요” 한마디 하는데, 오늘은 침대가 온돌처럼 따끈따끈했고, 덮어준 담요도 따뜻했다. 수술 준비도 “우리는 베스트 팀이에요” 하면서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며 모두 활짝 웃는 분위기가 참으로 상큼했다. 이렇게 좋은 분위기면 내가 죽을 염려는 없을 것 같은 데도 이상하게 순간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감이 엄습해왔다. 나도 모르게 “아, 사실 나 무서워 !”했더니, 통통 튀는 유머를 이어가며 신경을 다른 데로 돌려주었다. 그리고 회복실에서 깨어난 것이다. 결과는 먼저보다 훨씬 좋아져서 그래도 모르니 2개월 후에 보자는 기쁜 소식.     이렇게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곡예를 하다 보면 과연 우리의 삶 속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안 중요하고는 따질 엄두도 나지 않는다. 그저 지금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기적 같고, 그래서 감사하고, 기쁘고, 소중하다. 남을 신경 쓸 새도 없고, 내가 누릴 수 있는 생명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있는 대로 다 느끼고 싶다. 기운이 있는 한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맛있는 밥을 해주고 싶다. 마지막으론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글을 쓰고 싶다.     내 친구는 인생을 숨은그림찾기라고 표현했다. 그녀에게 절대 공감한다. 70년 훨씬 넘게 살았어도 인생엔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고, 하늘, 바람, 구름, 숲, 바다, 산, 들녘은 아무리 보고 또 봐도 한 번도 같은 얼굴을 보여주는 적이 없다. 우리의 숨은그림찾기는 그래서 무한하다. 이영주 / 수필가뉴욕의 맛과 멋 숨은그림찾기 인생 이번 수술실 폐암 수술 집도의가 회복실

2022-03-11

[뉴욕의 맛과 멋] 꿈의 디자이너 디올

지난 12월부터 브루클린 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크리스찬 디올: 꿈의 디자이너’(Christian Dior: Designers of Dreams) 전시회에 다녀왔다. 브루클린 뮤지엄은 그 크기와 보유 예술품 규모도 압도적이지만, 예술작품을 통해 세상을 보고 자극받을 수 있도록 다양한 기획전시를 해서 내가 좋아하는 미술관이다. 오래전의 바스키아 전시도 그렇고, 이번의 디올 전시도 그러하다.     원래 디올은 순수미술 쪽이었지만, 그래서 갤러리도 열었지만, 세계 대공황으로 갤러리를 접고, 생계를 위해 패션 일러스트로 활동을 시작한 게 패션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전시는 1946년, 디올의 첫 오트 쿠튀르 하우스 시절의 허리가 잘록하고 밑으로 갈수록 퍼지는 드레스들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1952년, 디올이 이탈리아에서 사고로 사망한 이후 크리스찬 디올 브랜드를 거쳐 간이브 생 로랑, 마르크 보앙, 지안프랑코 페레, 존 갈리아노, 라프 시몬스, 현재의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에 이르기까지 7명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의 작업이 연대기적으로 펼쳐진다. 이들 모두 디올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여성·꽃·예술·역사·문화 등 디올 브랜드를 대표하는 다양한 테마를 자신들만의 철학으로 재해석했다. 대규모 전시임에도 절묘한 구성과 드라마틱한 연출은 패션을 통해 고전과 현대의 예술적 조화까지 창출해주는 서사를 담았다.     전시의 압권은 ‘아름다운 18세기’ 전시관이다. 베르사유 궁전 내부 거울의 방을 본떠 제작된 전시장은 까마득히 높은 거울 벽면에 고전 회화의 무도회장에 등장하는 클래식한 디올의 의상들이 거울에 반사돼 환상, 그 자체였다. 사람들 모두 입을 벌리고 선 자리에서 그저 빙글빙글 돈다.   여기서 패션과 미술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많은 디자이너가 화가들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는다. 여성성을 강조한 디올의 패션 철학 역시 18세기 프랑스 화가 엘리자베스 르 브런(Elisabeth Vigee Le Brun)의 초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의복, 스타일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한다. 신고전주의 양식인 베르사유 궁전의 건축 양식은 물론 궁전 내부의 루이 15, 16세가 사용하던 장식적인 가구들도 그의 디자인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는 건 익히 알고 있는 바다.   그러나 가장 역사적인 콜라보는이브 생 로랑과 몬드리안의 만남일 것이다. 1965년 발표돼 몬드리안 룩이라고 명명된 몬드리안 드레스는 생 로랑의 대명사가 되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매혹적이고 퇴폐적인 화려함은 로렌 스캇의 옷에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땡땡이 그림으로 세계 미술계를 평정한 쿠사마 야요이는 루이 비통과 함께, 그리고 마크 제이콥스와 무라카미 다카시, 리바이스와 데미안 허스트, 유니클로와 키스 해링 등 너무 많다.     크리스찬 디올(1905-1952)은 자기의 드레스가 모든  여성을 공주님으로 만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모든 여성에게 패션은 자신을 공주님으로 착각하고 싶은 욕구의 발현이다.     디올의 이름 크리스찬은 내 둘째 사위와 같다. 둘째 사위 크리스찬은 컴퓨터 그래픽 디자이너인데, 내가 만든 쌈장을 아주 좋아하는 진짜 한국의 맛을 아는 친구다. 그의 패션도 현재의 트렌드를 리드하는 패셔니스타라고 할 만큼 핫하다. 친구들은 그런 크리스찬이 미남 사위라고 부러워하는데 내 눈엔 글쎄… 크리스찬이란 이름이 좋은 건가? 같은 이름의 두 사람을 감히 견주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인가? 이영주 / 수필가뉴욕의 맛과 멋 디자이너 디올 크리스찬 디올 디올 전시 디올 브랜드

2022-02-11

[뉴욕의 맛과 멋] 우리 속의 세계

오는 7월에 막내가 결혼한다. 딸이 결혼한다고 하니까 우선 걱정이 ‘결혼식에 뭘 입지?’였다. 큰딸이 엄마가 입을 멋진 드레스를 그 전에 사주겠다고는 했지만, 사실 요즘 패션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처럼 복고풍 좋아하는 사람은 옷 고르기가 여간 까다롭지가 않다. 옷장을 정리하면서 보니 20년, 30년 전에 장만했던 옷들이 오히려 지금 입어도 손색없어 보여서 만일 마땅한 드레스를 고르지 못할 경우, 옛날 옷들을 입기로 작정했다.   TV 프로에 영화 ‘오징어 게임’의 주인공 배우 이정재가 출연한 것을 보았다. 이정재는 그 나이에 다리가 꼭 끼는 광택 있는 가죽바지를 입고 나왔다. 이정재는 10년, 20년 후에도 그런 가죽바지를 입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한다. 패션의 완성은 옷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던 차에 그렇게 말하는 그를 보면서 아, 이 배우는 늘 젊게 살고 싶구나! 싶었다.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을 받은노장 배우 오영수 옹이 생각났다. 골든글로브 한국 배우 최초 수상자인 그는 “내일 연극이 있다. 그 준비가 나에게 더 중요한 일이다”라며 인터뷰 제안을 단박에 거절했다. 작품의 주제를 희석한다고 치킨 광고도 거부한 그다. 요즘 그의 일상생활도 전과 다르지 않다고 한다. 매일 아침 평행봉으로 체력을 단련하고, 경기도 성남 집에서 공연장인 서울 대학로까지 왕복 세 시간을 지하철로 이동한다는 소식이다. “가장 행복한 순간은 ‘가족들과 함께 식사할 때’, 가장 좋아하는 말은 ‘아름답다’”라는 그는 “이제 ‘세계 속의 우리’가 아니고 ‘우리 속의 세계’다. 우리 문화의 향기를 안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가슴 깊이 안고, 세계의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 아름다운 삶을 사시길 바란다”는 수상 소감을 전했다. 연극배우로 50년 넘게 한국 연극의 역사를 지켜온 그의 곤곤하고 깊은 철학과 자세는 “진정한 승자는 하고 싶은 일을 최선을 다해서 어떤 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사람”이라는 그의 말로 정점을 찍는다.     엘렌 바스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한다. 올챙이는 개구리가, 애벌레는 나비가, 상처받은 인간은 완전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성이다”라고 했다. 패션도 결국은 자기가 되고자 하는 한 방편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오버사이즈 옷을 입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몸이 너무 비대해서 그 모습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넉넉하게 품이 큰 옷을 입기 시작한 것이다. 막상 큰 옷을 입어보니 생각보다 장점이 많았다. 우선 정확한 몸매가 드러나지 않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무엇보다 몸이 옷 안에서 많이 자유롭다. 이젠 티셔츠 같은 것은 아예 두 사이즈 큰 것을 산다. 겨드랑이만 줄이면 튀어나온 배나 굽은 어깨 등, 몸의 단점이 커버되면서 낙락하니 옷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보기에도 촌스럽지 않다. 요즘은 오히려 그런 스타일이 핫! 하다.     자유로워진 몸은 뒤집어 생각하면 집착으로부터의 자유일 수도 있다.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오는 것이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우리는 궁극적인 행복을 만나는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그것이 중도(中道)이고 무심(無心)이며 열반(涅槃)이고, 상락아정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는 좋아한다. ‘세계 속의 우리’가 아니고 ‘우리 속의 세계’라는 오영수 옹의 말은 패션 철학과도 찰떡궁합이다. 이영주 / 수필가뉴욕의 맛과 멋 세계 배우 오영수 골든글로브 한국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

2022-01-14

[뉴욕의 맛과 멋] 새해 첫 기적

새해 아침이다. 설렌다. 가슴이 콩닥거린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올해는 또 어떤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까.     내가 사는 아파트는 한 층에 여덟 가구가 산다. 내 쪽 윙에 네 집, 반대쪽에 네 집이다. 이사 온 지 3년이 됐어도 서로 잘 모른다. 유일하게 안면을 튼 앞집 파실리아는 한 시간마다 한 번씩 엘리베이터를 타고 밖으로 나간다. 하도 이상해서 하루는 “왜 그렇게 자주 밖으로 나가느냐?”고 물었더니 “담배 피러 나간다”는 것이다. 나 같으면 담배를 끊지, 한 시간마다 담배 피러 춥고, 바람 불고, 비가 올 때도 밖에 나가서 담배 피우는 처량한 짓은 안 하지 싶다.     바로 옆집은 한국 부부가 사는데, 서너번 지나치며 인사한 게 전부다. 파실리아 옆집 사람은 인사는커녕 얼굴도 거의 본 적 없다. 어슴푸레 아랍계 사람이겠거니 추측한다. 크리스마스 전날, 과자를 구워 이 이웃사촌들에게 크리스마스 카드와 함께 전했다.   워낙 나는 낯가림이 심해서 아침에 공원에 가서 걸을 때도 사람들과 인사를 하는 적이 거의 없다. 상대방이 인사하면 답례해주는 정도다. 그런데 요즘은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만나면 내가 먼저 인사한다. 갑자기 착한 사람이 되려고 작정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렇게 안 하던 짓을 하는 건지 사실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행복한 만큼 남들도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인 것도 같다. 한 번뿐인 인생, 길지도 않은 인생을 왜 불행한 얼굴로 낭비하느냐는 게 내 지론이다.     언제나 웃는 얼굴인 손흥민 선수의 인터뷰를 본 적 있다. 시합에 졌을 때 기분이 어떠냐? 그 기분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질문에 손 선수는 망설임 없이 “저는 시합에 졌다고 기분 나쁜 적 없어요. 왜 졌는가 복기해보면 내가 부족했던 부분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 부분을 열심히 연습해서 다음 시합 땐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배우는 게 나는 기뻐요”하고 대답했다. 실패를 통해 자기의 부족한 부분을 학습하며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축복이고 은총임을 우리는 망각하고 살고 있다. 행복은 쉽게 생각하면 매우 쉽다. 오늘이 내 생에 마지막 날이라 생각해보자. 그러면 오늘 하루가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가. 그러면 우리는 불행할 시간이 없다. 욕심을 버리고, 집착을 버리고, 분노도 삭이고, 불평은 물론이고 시간 낭비도 안 할 것이며 남을 비판할 여유도 없을 것이다. 가족들이 더욱 애틋하고, 소원했던 친구도 그립고, 이 세상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질 것이다. 각자의 보폭과 속도에 맞춰 자기 길을 가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오늘 하루만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며 살아보면 그 하루는 상상보다 찬란한 신세계가 될 것이다. 그래서 새해는 기적이고, 우리의 매일도기적인 것이다.     반칠환 시인의 ‘새해 첫 기적’이란 시가 생각난다.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의미심장한 이 시처럼, 우리 모두 황새가 되어, 말이 되어, 거북이가 되어, 달팽이가 되어, 굼벵이가 되어, 바위가 되어서, 새해의 첫 기적을 매일의 기적으로 만들고 싶은 게 내 새해 소망이다. 이영주 / 수필가뉴욕의 맛과 멋 새해 기적 새해 첫날 시간 낭비 크리스마스 카드

2021-12-31

[뉴욕의 맛과 멋] 정형(定型)을 비틀다

겨울모자가 필요해서 백화점에 갔다. 예전과 달라서 요즘은 백화점의 존재가 옛날만큼 위력적이지 않다. 오히려 브랜드들의 점포들이 품격을 지키고 있다. 다음날, 동네 부티크에 가니 백화점보다 모자가 많았고, 그중에서 맘에 드는 걸 하나 찾았다. 나는 운두가 높고 챙이 달린 모자가 잘 어울려서 남자 중절모 스타일의 모자를 선호한다. 내가 고른 모자는 특별하지는 않으나 정형(定型)을 약간 비틀었달까. 심플하고 스포티한 것도 같으면서 운두가 높고 챙도 넓지 않아 내 얼굴에 잘 어울렸다.    모자를 쓰기 시작한 지는 오래됐다. 처음엔 머리 정수리에 원형탈모가 생기는 바람에 쓰게 된 것인데, 외출할 때도 머리 손질할 필요 없이 모자 하나 눌러쓰면 그만이니 편하기 그지없었다. 무엇보다 모자를 쓰면 마치 패셔니스타처럼 남달라 보이는 멋스러운 모습이 기분 좋았다. 남들과 똑같이 입는 것보다 남들과 다른 게 때로는 신선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나는 소심하고 낯을 가리는 편이라 비교적 정답에 가까운 유형이지만, 나만의 내가 되고자 하는 욕망은 적지 않았다. 나의 반란은 단발머리 시절에 그 단발을 언발란스로 자른다든지, 미니스커트가 처음 유행했을 때 나만은 샤넬라인을 굳세게 지켰다든지, 남들은 눈치도 못 챌 정도로 미미한 반란이었다. 대학 시절엔 데카당스나 아방가르드란 단어를 좋아해서 마치 내가 그런 전위적인 인물인 양 그 분위기에 취해 지냈다. 뭐 어떤 행동은 아니고 그저 남들이 안 입는 7부 코트를 입는다든가 청치마에 동대문 구제품 시장에서 산 초록색 남방을 입고 유행의 선도자인 양 코를 들고 다녔다. 비 오는 날엔 카페 의자에 몸을 묻고 앉아 샹송을 들었고, 쓰는 글들도 그런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렇게 뭔가 새로운 것을 좇는 존재로 모험하듯, 도전하듯, 일생을 살아온 것 같다.     파리에 사는 디자이너 박지원 씨는 내가 좋아하는 젊은 친구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그녀의 20대 시절이었다. 그때 그녀는 유명한 패션모델이자 잘 나가는 패션디자이너였다. 그녀는 재주가 무한대다. 디자이너니 만큼 패션도 뛰어나지만, 요리하면 냉장고에 있던 재료든 자연에서 얻는 재료든 그녀만의 창의적인 요리를 만들어내는 최고의 요리사다. 거기에 프레젠테이션까지 완벽한 요리가 되니 사진만 봐도 침이 넘어간다. 서울에 가서 팝업 레스토랑을 2주일간 열어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정도다. 그녀가 우러러 보이는 이유는 절대 평탄치 않았을 인생의 터널들을 통해 자기를 분해하고 다시 조립해 인문학적으로 성숙시킨 모습이다. 그런 그녀만의 깊은 내공은 그녀가 쓰는 글에서 그 유려함과 깊은 철학적 사고가 별처럼 빛난다.     내가 모자를 쓰는 이유도, 정형 비틀기를 지속하는 것도 결국은 뭔가 다른 삶, 삶다운 삶을 살고 싶다는 나만의 어떤 표현법일 수도 있다. 우리는 매일의 일상 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참 많은 것을 배운다. 그런 우리들의 작은 배움들이 모여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박지원이란 여성이 많은 여성에게 삶을 개척해가는 용기와 지혜를 전파하듯이.   코코 샤넬도 “단순함이란 모든 우아함의 기본이다.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고 말했다. 이영주 / 수필가뉴욕의 맛과 멋 디자이너 박지원 모자 하나 입고 유행

2021-12-17

[뉴욕의 맛과 멋] 모과 향기처럼

며칠 전, 영선 씨가 모과를 가져왔다. 로사 씨의 주말 하우스는 남부 뉴저지에 있는데, 그곳에 영선 씨는 여러 가지 과일나무를 심었다.    영선 씨와 문기 씨 내외는 내가 일이 있을 때마다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특별한 친구들이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 그날도 원래는 점심 약속을 했었는데, 내가 몸이 좋지 않아 나가지 못하겠다고 했더니 문기 씨가 설렁탕 사서 모과랑 갖다 주자고 했다고 한다. 마침 영선 씨가 스파게티를 만들어서 이왕이면 홈메이드 스파게티가 나을 것 같아 따끈따끈한 스파게티 소스와 국수, 모과 한 보따리에 커다란 배 두 개를 얹어서 배달해준 것이다. 방금 만든 스파게티는 훌륭한 점심이 되었다.     모과(木瓜)는 유자와 함께 가을의 전령 중 하나이다. 한국에 살 때는 가을이면 유자와 모과를 사서 꿀에 재어 겨울 채비를 하는 게 일이었다. 중국이 원산지인 모과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조선 시대 이전이라고 추측한다. 모과는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못생긴 모양 때문에 천대받는 과일이다. 모과를 두고 사람들은 세 번 놀란다고 한다. 첫 번째는 너무 못생겨서, 두 번째는 향기가 그윽하고 좋아서, 세 번째는 맛이 시고 떫어서. 그런데 네 번째, 모과가 한약재로 유용하며 또 나무줄기가 단단하고 매끄러운 데다 다루기가 쉬워서 가구의 목재로 많이 쓰였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모과의 약효 또한 감기 예방이나 가래 제거, 기침을 멎게 해서 한방에서는 감기와 기관지염, 폐렴을 치료하는 데 사용하고, 구토나 설사, 이질에도 효과가 뛰어나다니, 생긴 것과 달리 쓰임새가 다양하다.     특히 모과는 썩어서도 그 향이 그대로라고 한다. 그래서 변치 않는 사랑의 표징이 되기도 한다. 모과의 사랑 전설은 고전인 시경(詩經)에도 나온다.     나에게 모과를 던져 오기에/ 어여쁜 패옥으로 갚아 주었지/ 꼭이 보답하고자 하기보다는/ 길이 사이좋게 지내보자고   그 시대 여자들은 수줍어서 직접 고백 대신 과일을 던져 사모하는 마음을 표시했고, 과일을 받은 남정네는 여인에게 보석으로 화답했다고 한다. 그 대목엔 모과뿐만 아니라 복숭아와 오얏도 나오는데, 썩어도 향기가 좋은 모과는 변치 않는 사랑에선 어느 과일도 이길 수 없는 고수일 것이다.     영선 씨가 준 모과를 깨끗이 썰어 꿀에 재어 담으면서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이가 든 게 참 좋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물론 나이를 먹으면 육체적으로 쇠진하는 건 사실이나 그보다는 나이 들어변한 내가 좋은 거다. 젊었을 때는 살면서 기쁜 일, 안타까운 일, 억장이 무너지는 일들로 고달팠다. 하지만 나이가 드니 그런 모든 일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그냥 흘러간다. 이제는 사람의 속이 보이고, 사람의 소중함이 속속들이 느껴져서 더 깊은 정을 주게 된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집착이 없으니 구속도 없는 자유로움이 모두를 내 편으로 만들어준다.     나도 어릴 때는 모과꽃처럼 작고 예뻤겠지. 자라서는 세파에 시달려 울퉁불퉁, 세월의 상처가 얼마나 많았을까. 비록 뒤뚱거리는 인생이었겠으나 그래도 말년엔 모과처럼 은은하게 향기를 내뿜는 ‘나’, 썩어서도 향내 나는 그런 ‘나’가 되면 괜찮은 인생이지 않을까. 영선 씨 덕에 모과차를 만들면서 또 한 수 배운다. 이영주 / 수필가뉴욕의 맛과 멋 모과 향기 모과 향기 모과가 한약재 모과가 우리나라

2021-12-03

[뉴욕의 맛과 멋]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나이를 먹은 탓도 있겠지만, 머리 쓰지 않고 단순한 삶을 지향하다 보니 관심사가 온통 먹는 일이 되었다. 사실 옛날 같으면 내 나이는 아랫목에 앉아 거드름 피우며 며느리가 해다 바치는 밥상을 받아먹는 나이다. 나 역시 그렇게 시어머니 모셨으니 아마 나도 그런 노후를 기대했는지, 날이 갈수록 하루 세끼 챙겨 먹는 일이 고달프다. 적당히 사서 먹으면 훨씬 쉬울 텐데, 가려먹는 음식 없이 다 잘 먹는다고 말은 그러면서, 사 먹는 음식은 도무지 입에 맞지 않는다. 힘들어도 결국은 내가 해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     얼마 전에 만든 베이비 돼지갈비커리만 해도 그렇다. 작고 살집 넉넉한 베이비 돼지갈비가 눈에 띄어 참지 못하고 사 왔다. 갈비를 물에 한 번 끓여 깨끗이 씻어서 소금, 후추, 레드와인에 재어 하룻밤 재운 후, 버터에 볶아서 충분히 익힌 후 양파를 넣고 다시 한소끔 볶았다. 거기에 멸치육수와 커리 소스를 넣고 끓여서 커리가 맛이 퍼지면 이번엔 기름에 튀긴 가지를 넣고 한소끔 더 끓이면 완성이다. 한참 전부터 돼지갈비로 커리를 만들어보고 싶었고, 당뇨가 있어서 감자와 당근 대신 가지를 넣었다. 가지는 익으면 쉽게 물쿼지므로 식감이 살지 않으므로, 기름에 한 번 튀겨서 넣으니 식감이 괜찮았다.     음식 맛은 들이는 정성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들어간 재료는 돼지고기, 양파, 가지의 3가지뿐이었지만, 정성을 다해 만든 커리의 맛은 대만족이었다. 아주 간단한 요리지만, 가지를 적당히 썰어서 소금, 후추 간만 하고 전분 가루를 묻혀서 튀기면 맛이 좋아 훌륭한 스낵도 되고, 반찬도 된다.     비단 음식뿐만 아니라 사람도 그렇다. 단순하고 소박한 사람이 좋다. 비교하기엔 조금 죄송스럽긴 한데, 내가 좋아하는 신부님이 한 분 계시다. 작년에 팬데믹으로 몬태나에서 지내면서 한국가톨릭 평화방송 TV를 통해 알게 된 신부님이다. 성서 속의 성인들 강의를 하시는데, 록스타 헤어스타일에 로만 칼라 양복 차림마저 패셔니스타처럼 빛나는 젊은 신부님이 매우 쉽고 단순하게 핵심을 확실하게 짚어주었고, 정확한 발음과 적절한 유머가 품격이 넘쳤다.     신부님은 미사도 형식적이 아니라 진심으로 열심히 집전하셨다. 너무 열중하시다가 노래 부르는 중에 삑사리가 났는데, 미사 말미에 그 사실까지 말씀하시며 교우들을 웃기신다. 성인 기념 주일엔 강론에서뿐만 아니라 미사 중간중간, 마무리에서까지 그 성인의 가르침을 되새겨 주신다. 사람 냄새나고 꾸밈없는 신부님을 통해 신앙이 우리 삶 안에 함께함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음식을 해보면 재료 수가 점점 줄어들수록 궁극엔 재료 자체의 맛에 충실해지고, 오히려 맛도 상승한다. 사람도 정직하고 단순한 사람에게 더 마음이 열린다. 거기엔 옷차림이 단정해야 한다는 대전제가 붙지만 말이다. 최고의 멋쟁이는 최고로 깨끗한 옷차림이라는 게 멋쟁이에 대한 내 정의다. 이런 진리들을 나이 먹어서야 깨닫게 되어 좀 그렇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도 깨우친 게 얼마나 다행인가.   김현승 시인은 ‘가을의 기도’라는 시에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 /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라고 노래했다. 시인에겐 가을이 비옥한 시간이지만, 내게는  지금 내 나이가 비옥한 시간이다. 그러니 이 시간을 잘 가꿔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기 위해 정성을 아끼지 않을 작정이다. 이영주 / 수필가뉴욕의 맛과 멋 비옥 시간 베이비 돼지갈비커리 커리 소스 소금 후추

2021-11-19

[뉴욕의 맛과 멋]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을이 되면 기도하게 됩니다. 높은 하늘, 파란 하늘이 슬프고, 지구에 색동옷 입히는 단풍도 슬프고, 소슬한 바람도 슬프고, 귀뚜라미 소리도 슬프고, 붉게 익은 사과도 슬프고, 석쇠 위에서 지글지글 구워지는 전어도 슬프고, 뜨거운 칼국수도 슬프고, 농익은 호박도 슬프고, 도깨비도 슬프고, 한 송이 핀 빨간 동백꽃도 슬프고, 대추차도 슬프고, 계피 향도 슬프고, 땅콩버터가 몸뚱이보다 더 크게 올라간 사과 조각도 슬프고, 탄생도 슬프고, 죽음도 슬프고, 아픔도 슬프고, 홍시도 슬프고, 아침에 뜨는 해를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도 슬픕니다.     슬픔은 그러나 그리움일 수도 있고, 동경일 수도 있고, 기다림일 수도 있고, 애달픔일 수도 있고, 애모일 수도 있고, 용서일 수도 있고, 고해일 수도 있으며, 후회와 비감과 두려움일 수도 있으며, 방황과 고뇌와 외로움, 동경일 수도 있으며 위로와 안도와 허무, 탄식일 수도 있으며 종래는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니 고정희 시인의 말처럼 ‘모든 사라지는 것들이 남긴 여백’이랄 수 있겠습니다. 가을에 드리는 기도는 그래서 감사의 기도로 귀결됩니다.     오늘 제가 살아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수술 후 회복이 아주 빨라졌습니다. 고맙습니다. 기침이 훨씬 줄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빨리 걸어도 전처럼 숨이 많이 차지 않습니다. 고맙습니다. 저는 더위를 탑니다. 그런데 요즘 날씨는 춥지도 덥지도 않습니다. 제가 걷기에 딱 좋은 날씨입니다. 그래서 오늘 2마일 걸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은 냄비를 태우지 않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빨래도 했습니다. 빨래하고 나면 빨아서 깨끗해진 옷들처럼 내 마음도 깨끗이 빨래한 것처럼 덩달아 맑아지는 느낌입니다. 고맙습니다. 좋아하는 어리굴젓을 샀습니다. 매우 맛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친구가 사과밭에서 딴 사과를 갖다 주었습니다. 사과 향이 진하면서 맛이 신선하고 입 안에 향기로운 단맛이 넘쳤습니다. 고맙습니다. 한동안 멀어졌던 독서가 다시 맛있어졌습니다. 고맙습니다. 짜장면 소스를 만들었습니다. 실패했습니다. 덕분에 시중에서 파는 인스턴트 파우더가 별맛 없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비참하게도, 강하게도 만들 수 있다. 이 두 가지 일을 이루는 데 드는 에너지는 같다”는 카로스카스테네다의 말에 공감하는 이유는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로 살아라, 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기 때문입니다. 박완서 선생의 문학도 보면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주저하지 않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박완서 선생은 ‘엄마의 말뚝’이란 단편에서 “신여성이란 공부를 많이 해서 세상의 이치에 대해 모르는 게 없고,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자”라고 일갈하셨는데, 선생의 큰따님인 작가 호원숙은 이 구절이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을 포함,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라고 하면서, 이 구절을 통해 ‘많은 이들이 세상의 이치를 깨쳐 자유롭게 나가는 상태를 그리게 된다’고 합니다.   가을 아침, 창밖의 고목을 바라보며 의식의 흐름에 정신줄을 놓으니 이런저런생각들이 엉킵니다. 박완서 선생의 신여성이 되어 자기의 가슴이 시키는 대로 자기 길을 가다 보면 언젠가는 원하는 삶의 모퉁이에 다다르지 않을까. 아니 우선 전혜린 선생처럼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로 기도부터 마칠까 합니다. 이영주 / 수필가뉴욕의 맛과 멋 박완서 선생 전혜린 선생 사과 조각도

2021-11-05

[뉴욕의 맛과 멋] 모닥불 피워 놓고

 날씨가 스산해지며 가을이 어느새 군밤처럼 달큰하게 익었다. 업스테이트 뉴욕의 덴버 베가마운틴엔 이미 절정의 단풍이 안녕을 고하고, 떨어진 낙엽으로 하여 나무들의 머리숱이 많이 줄었다. 그래도 겹겹이 동고동락하는 산의 능선 위로 햇빛이 비치면 그 빛의 각도에 따라 산의 무늬들이 황홀한 단풍의 빛나는 색동 쇼가 화려하게 개최된다.   ‘푸른 하늘이 담겨서/ 더욱 투명해진 내 마음/ 붉은 단풍에 물들어/ 더욱 따뜻해진 내 마음/ 우표 없이 부칠테니/ 알아서 가져 가실래요?/ 서먹했던 이들끼리도/ 정다운 벗이 될 것만 같은/ 눈부시게 고운 10월 어느 날’이라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가 어쩌면 그렇게 절묘하게 우리들의 정서와 합일되는지, 그것 또한 또 하나의 경이다.   베가마운틴의 친구 집에선 난롯불이나 모닥불을 자주 피운다. 친구가 장작으로 불을 지피면 그 앞에 앉아 불멍을 때린다. 그냥 그렇게 앉아 무념무상의 세계에 빠져들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평화가 안개처럼 온몸에 스며들고, 무엇이든 다 지나가는 것처럼 온몸의 세포 마디마디가 나비처럼 하모니를 이루며 세레나데를 구가한다. 힐링이라고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몸과 마음이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녹아 새로운 불꽃으로 환생 되는 신선한 꿈이 이루어진다. 그 안에는 안방 화로 주위에 둘러앉아 군밤이 익으면 잿속에서 꺼내 껍질 까주시던 다정한 아버지의 얼굴도 있고, 혹여 늦게 돌아오시는 아버지를 위해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데우시던 엄마의 웃는 얼굴도 있다. 내복 바람으로 밤늦게까지 가족들이 그렇게 모여 깔깔대며 장난치던 그 시절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지금은 기억 속의 동화로 아득하다.     난로 앞으로 친구가 뜨거운 차를 가져다준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차의 따뜻한 감촉이 기분 좋다. 장작불에 미니 고구마도 구워 먹고, 땅콩도 굽고, 때로는 갈비며 생선도 굽는다. 그곳에 앉아 책도 읽고, 때론 와인과 치즈도 즐기며 그냥 앉아 졸기도 한다.   ‘모닥불’이란 시에서 백석 시인은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이라며 무엇이든 다 태울 수 있는 모닥불의 무한대 포용을 설파했다. 그러면서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시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고 우리네 척박한 살림살이를 아울렀다. 비록 현실은 그럴지라도 무엇이든 불을 일궈 서로의 가슴을 훈훈하게 녹이는 인정을 일깨워 주었달까. 사실 마지막 연의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뭉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고 할아버지의 슬픔을 통해 민족의 아픔까지 얘기해 좀 어렵긴 하지만, 모닥불이 주는 그 화합과 따사로운 정감은 늘 우리 가슴 속에 불씨로 남아 있다.     난로 앞에 오래 앉아 있다 보니 사실 딱히 하고 싶은 말도 없다. 그냥 이 찬란한 10월에 박인희의 노래처럼 ‘모닥불 피워 놓고 마주 앉아서, 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이니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그렇게 불멍! 때리며 우리들의 끝없는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다.     카뮈도 말하지 않았는가.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찾아 헤맨다면 당신은 절대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면 당신은 절대 삶을 살지 못할 것이다’라고. 이영주 / 수필가뉴욕의 맛과 멋 모닥불 모두 모닥불 우리 할아버지 덴버 베가마운틴

202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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